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_ 고명섭
“지혜를 찾아가는 길은 많지만,
철학의 숲으로 난 길이야말로
지혜를 찾는 자에게 가장 친숙한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마르크스, 베유, 랑시에르까지
철학의 숲에서 만나는 사유의 모험가들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듯, 필로소포스(philosophos)는 지혜에 끌려 지혜를 찾는 자를 뜻한다. 지혜를 찾아가는 길은 많지만, 철학의 숲으로 난 길이야말로 지혜를 찾는 자에게 가장 친숙한 길이다.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동서양 철학의 기둥이 된 고전부터 21세기 사유의 최전선에 선 사상가들의 저서까지 76권을 통해 철학의 숲을 답사한다. 그 숲길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홉스, 마르크스, 베버, 아렌트, 푸코, 베유, 에스포지토, 그리고 붓다와 수운과 만해 같은 정신의 모험가들과 조우한다.
“철학의 숲에서 만나는 이들은 다 사유의 친구다. 친구들이 해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궁금해 못 견딜 것 같으면 조심스레 물어본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를 서둘러 기록한 것들의 모음, 이것도 작은 사유의 숲일지 모른다. 숲은 숲을 키운다. 숲은 잠들지 않는다.”
《하이데거 극장》, 《니체 극장》의 저자 고명섭
영원회귀의 날들 속에서 차이의 희망을 발견하는 책 읽기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하이데거의 깊고 어두운 사유 세계를 탐사한 《하이데거 극장》으로 제38회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 고명섭의 신작이다. 새 책에서 저자는 역사와 철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과 인문학적 통찰력으로 우리를 철학의 숲으로 안내한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76권을 다루면서 각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즉 철학자와 사상가 들의 사상과 주요 개념, 역사적 ․ 학문적 배경, 영향과 의의까지 세심하게 짚어줌으로써 독자에게 맥락의 독서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저자에게 책 읽기는 “모르는 곳을 돌아다니는 오디세우스의 모험, 끝없이 되풀이되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닮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철학의 숲을 찾는 필로소포스들을 위한 지도이자, 정확하고 확실한 앎을 향해 끝없이 계속되는 모험을 담은 정신의 오디세이아라 할 수 있다.
“니체는 알프스 고산 마을 실스마리아의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산책하던 중 영원회귀 계시를 받았다. 우주적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아무런 차이도 없이 똑같이 되풀이되리라는 영감이 뇌를 뚫고 들어왔다.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끝날 것이다.’ 니체는 커다란 바위 옆에서 난데없는 영감을 받고 폭포수 같은 격정의 눈물을 흘렸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똑같은 것이 한치도 다르지 않게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되 조금씩 달라지는 반복이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반복’이다. 책 읽기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떠올리게 한다. 책이라는 동일한 것을 끝없이 읽고 또 읽는다. 그 반복의 바퀴는 굴러서 어디에 이를까?” _ ‘머리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앎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것
철학의 쓸모, 철학이 주는 위안을 이야기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공허한 학문으로 여겨지기 일쑤다. “존재란 무엇인가?” “세계의 제1원인은 무엇인가?” 같은 물음이 도대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신과 인간, 존재와 세계에 대한 본질적 사유를 통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고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해 인간 삶의 목표인 ‘행복’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좋은 정체’에 대한 생각으로 나아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통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좋은 민주정은 시민의 역량 없이는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시민의 역량은 경제적 평등 없이는 키울 수 없다.” (본문 219~223쪽)
“선한 신이 창조한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를 물으며 평생 고뇌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신이 준 자유의지를 따라 선을 행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의가 없는 왕국이란 거대한 강도떼와 다를 바 없”었다. (228~232쪽)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의 사상은 종교적 신비주의와 정치적 행동주의의 결합 속에서 영글었다. 베유는 철학 교사,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였으며 에스파냐 내전에 아나키스트 부대로 참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나치 독일에 맞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의 선함과 신의 사랑을 믿으면서도 교회 바깥에 머물렀던 베유는 권력과 국가를 숭배하는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고 신비주의 영성에 주목했다. 베유의 영성적 사유는 당대 유럽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28~33쪽)
이렇게 이 책에서 독자들은 철학적 사유가 바탕이 되어 분출한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 통찰의 순간들을 목도하며 철학과 현실이 맞닿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옛 신들이 떠나고 새로운 신들은 오지 않은” 궁핍한 시대에 새 길을 찾으려 했던 지적 거인들의 이야기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인류 공통의 문제를 발견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동일성에도 차이에도 머무르지 마라
- 궁핍의 시대가 부른 전환의 사유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먼저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을 분석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상가들의 책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1장에서 나란히 소개되는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과 독일 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의 《단독성들의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문화적 자본주의가 낳은 후기 근대의 고립되고 우울한 개인과 사회상을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한다. 1장에서는 또한 “21세기 철학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꼽을 수 있는 유물론의 귀환과 신학의 귀환”을 보여주는 저서들을 통해 오늘날 인류가 맞은 문명사적 위기와 변화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나르시시즘 사회는 개인을 고독으로 몰아넣는다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이라는 저서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의 여성 철학자다. 철학 저술과 언론 활동을 병행하는 카림은 오스트리아의 극우화에 맞서 정치적 저항 운동을 벌이는 실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2022)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분석하는 카림의 철학적 사유가 번득이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카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개인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통해 작동함을 밝혀 보인다. (34쪽)
동일성에도 차이에도 머무르지 마라
서양의 사유 특성으로 흔히 수학적 사유가 거론된다. 수학의 엄격한 논리적 사유가 서양의 전통 철학을 낳았고 이 철학에 기초해 근대 물리학이 탄생했으며 물리학의 수리적 사유가 모델이 돼 다른 분과 학문들의 과학적 사유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수학과 논리학의 사유 형식이 근대 유럽의 세계 지배를 떠받친 정신적 힘이었다. 이 수리 논리적 사유를 ‘동일성 사유’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지식의 기초》는 이 동일성 사유의 역사를 드넓게 조망하는 책이다. (50쪽)
‘전체성의 존재론’ 넘어 ‘타자의 무한성’으로
레비나스는 전쟁이 끝나고서야 (리투아니아의 가족이 모두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레비나스는 전체주의 폭력의 근원을 살핌으로써 그 폭력을 넘어설 길을 찾는 데 철학적 사유를 바쳤는데, 그 사유가 응집된 저작이 주저 《전체성과 무한》(1961)이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서구 철학의 존재론을 전체주의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 서구 존재론은 내가 만든 전체 체계 안으로 모든 타자를 포획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전체성의 철학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멸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동일성의 존재론이 전체주의 폭력을 산출했다. (67쪽)
예술의 민주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키운다
정치란 아무리 목소리를 내도 소음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배제된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들리게 함으로써 그 감각계의 분할을 바꾸는 일이다. 그것이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다. 랑시에르는 그 정치(politique)를 치안(police)에 맞세운다. 통상의 ‘정치’는 기성의 감각 질서 안에서 그 질서를 다스리는 ‘치안’일 뿐이다. 참된 정치는 그 질서를 변혁하는 데 있다. 랑시에르의 ‘미학’은 바로 이 감각 혹은 감성의 질서를 겨냥하는 학문이다. (84쪽)
브뤼노 라투르 유물론에서 끌어낸 낯선 신학
21세기 철학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유물론의 귀환과 함께 신학의 귀환을 꼽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유물론이 오랫동안 대척 관계에 있던 신학과 결합해 ‘유물론적 신학’이라고 부를 만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종교철학자 애덤 밀러가 쓴 《사변적 은혜》(2013)는 신유물론 철학의 대부인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신학의 구성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106쪽)
우주는 생각하는 거대한 뇌일까
- 우주와 생명에 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탐구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이라는 부제를 생각하면 2장에서 다소 의아함을 느낄지 모른다. 이탈리아 출신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화이트홀》이나 ‘양자 경관 다중 우주 이론’의 창시자인 로라 머시니-호턴의 《무한한 가능성들의 우주》 같은 과학 책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우주의 탄생과 양자 세계에 대한 연구가 종교적 세계관과 만나고, 생물학 연구가 사회 이론으로 확장되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양자 이론은 대승불교 ‘공’ 사상으로 통한다
양자 세계는 상호 작용이라는 관계를 통해 속성이 일시적으로 결정되는 세계이므로, 확정된 속성을 지닌 불변의 실체라는 우리의 통상적 인식은 양자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양자 세계를 바탕으로 삼는 우리의 거시 세계도 근원적으로는 이런 관계적 속성으로 구성된 세계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런 관점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거론한다. 나가르주나(용수)가 가르친 공 사상의 핵심은 “다른 어떤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138~139쪽)
우주는 생각하는 거대한 뇌일까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자비네 호센펠더가 쓴 《물리학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2022)는 지난 100여 년의 물리학 발전이 낳은 수많은 물음을 아홉 가지로 간추려 솔직하고 과감하게 답한다. … 결론에서 호센펠더는 “창조주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스티븐 호킹의 단언을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과학은 자기 과신을 버리고 겸손을 배워야 한다. “과학 자체로는 한계가 있고, 인간은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방식의 설명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는 앞으로도 동행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145쪽, 149쪽)
모든 생명체는 자기생성 하는 닫힌 체계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자기생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칠레 생물학자다. 마투라나의 초기 연구는 신경생물학에 집중됐는데, 이 연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두 편의 논문이 1969년 발표한 <인지생물학>과 1972년 동료 생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함께 쓴 <자기생성: 살아 있음의 조직> 이다. 《자기생성과 인지》는 이 두 편의 논문을 묶은 책이다. 1980년에 나온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마투라나 생물학에 자극받아 사회 체계 이론을 확립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166쪽)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도나 해러웨이는 전복적 상상력으로 페미니즘 이론을 혁신한 미국의 학자다. 해러웨이의 이력은 독특하다. 동물학·철학·문학을 전공하고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과학사학자가 됐다. 이런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해러웨이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언어와 사유로 페미니즘 이론의 새 국면을 열어젖혔다. … 해러웨이의 사유 망치가 부수려 하는 것은 장벽처럼 굳게 서 있는 존재론적 경계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영장류, 사이보그, 여자’가 이 경계에 놓인 존재들이다. (197쪽, 198쪽)
영혼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3장에 이르면 앞서 본 철학자들의 논의가 하나로 모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서양 철학의 뿌리이자 기둥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시학》《분석론》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중심으로 해서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정립한 플로티노스, 중세 신학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해 서양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사상이 펼쳐진다.
스토아 철학자의 내면에 들끓는 반스토아주의 열정
로마 제국 시대 초기 스토아 학파의 대표자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는 비극 작가이기도 했다. … 세네카 작품 속 메데이아는 스토아적 침착함으로 스토아적 경건주의를 짓밟는, 가장 반스토아적인 사람이다. 스토아 철학자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극의 전개이자 결말이다. 인간 세네카에게 스토아 철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어두운 내면 세계가 있었음을 이 비극 작품은 증언한다. (238쪽, 241쪽)
‘영혼’이 ‘신’에 이르는 여정 그리는 플로티노스 신비철학
플로티노스(205~270)는 플라톤 철학을 일신해 ‘신플라톤주의’를 정립한 고대 후기 철학자다. … 주목할 것은 플로티노스 사상이 이 세상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끝낸 영혼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 신에게서 얻은 ‘좋음’에 대한 지혜를 이웃에 나누어준다. 또 저 세계의 아름다움을 모범으로 삼아 이 세계를 아름다운 세계로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그렇게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아름다움의 다리를 만드는 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사명이다. 플로티노스의 신비철학은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나라를 설계하고 추구하는 정치철학이기도 하다. (247쪽, 251쪽)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은 논리학 저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과 역사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시인은 일어날 것 같은 일을 말한다. 따라서 시는 역사 서술보다 더 철학적이며 더 위대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역사 서술은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극과 역사 서술은 유사하지만, 그 행위 속에서 보편적 원리를 찾아내고 보편적 논리를 구축한다는 점에서는 비극이 역사 서술보다 우월하다는 얘기다. 삶의 논리학이라는 새로운 이해의 빛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다시 읽으면, 《시학》은 창작의 비밀을 알려주는 지침서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텍스트로 나타난다. (262쪽)
영성과 개벽의 정치를 찾아서
- 진정한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국내외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관련해 자유주의, 민주주의, 진보, 보수, 파시즘 같은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특히 4장이 반가울 것이다.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 선출된 공직자의 권력 남용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다면,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사회 면역》이나 공화정과 삼권분립을 비롯한 미국 헌법의 근본 사상을 설명한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를 다룬 글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장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에 등장한 한반도 개벽 사상을 다룬 책부터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한 항거의 의지를 일깨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책들이다.
“공동체 살리는 ‘면역’은 약이자 독”
민주주의는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인민 주권’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평등성이라는 원칙이 절대화하면 민주주의 자체가 죽어버리는 역설이 벌어진다. 인민의 일반의지가 무차별로 적용될 때 인민독재라는 전제정치가 나타나 개인들의 차이를 휩쓸어버리는 것이다. …
선거로 대리인을 뽑아 의회로 내보내는 대표제가 인민독재를 막는 길이다. 대표제는 ‘뛰어난 자들의 정치’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귀족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귀족정치가 과도해지면 소수 엘리트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과두정치로 떨어진다. 대표제라는 장치가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면역 구실을 하지만, 그것이 과잉이 되면 민주주의를 죽이는 독극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307~308쪽)
잃어버린 자유주의 역사 되찾기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에서 저자 헬레나 로젠블랫은)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가 ‘개인의 권리와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선의 증진,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이기심을 넘어선 도덕적 성숙’에 있다고 강조하며 자유주의의 본디 가치를 바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이 역사적 경로를 통해 그려낸 자유주의는 오늘날 통용되는 자유주의보다는 진보적 공화주의를 더 닮았다.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와 상충하기는커녕 그 본디 이념에서 보면 공화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이념이라는 것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316쪽)
선출된 공직자의 권력 남용 막으려면
“애초에 정부란 무엇인가? 인간성에 대한 가장 큰 불신의 표출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만약 인간이 천사라면 어떤 정부도 필요 없을 것이다. 또 천사가 인간을 다스린다면 정부에 대한 외부적 통제도 내부적 통제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의 남용을 막으려면 다른 권력의 견제를 빌리는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두고 매디슨은 “야심에는 야심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삼권분립이다.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가 독립해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권력 남용을 막는 길이다. 권력자가 국민을 억압하지 못하게 하려면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도로 구현돼야 하는 것이다. (332쪽)
고명섭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겨레신문 기자로 일했다. 하이데거의 깊고 어두운 사유 세계를 탐사한 《하이데거 극장: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전 2권)으로 2023년 제38회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이밖에 니체라는 희귀한 철학자의 정신을 답사한 《니체 극장: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광기와 천재: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생각의 요새: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만남의 철학: 김상봉과 고명섭의 철학 대담》(공저), 《즐거운 지식: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담론의 발견: 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 《지식의 발견: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를 썼으며, 시집 《숲의 상형문자》, 《황혼녘 햇살에 빛나는 구렁이알을 삼키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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