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11월, 고토쿠 슈스이는 동료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와 함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을 번역해 《평민신문》 제53호에 발표하고 이듬해 책으로 펴냈다. 이 번역본에서 고토쿠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자산계급, 무산계급이라는 용어로 최초로 번역했다고 한다. 고토쿠의 번역본이 출간된 뒤 일본에 머물던 중국인 혁명가들이 그 번역본의 영향으로 자신들이 펴내는 잡지에 《공산당 선언》 일부를 소개했다. 이후 중국에서 《공산당 선언》이 완역된 것은 1920년 4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창당을 준비하던 천왕다오(陳望道)가 번역한 것이었고, 한국에서는 1921년에 여운형이 최초로 번역하였다.
금기가 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는 누구인가?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한 후 고토쿠 슈스이는 철저히 지워졌다. 공판 과정부터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재판 기록은 비밀에 부쳐졌으며, 처형 뒤에는 그가 묻힌 무덤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당국의 지시가 내려졌다. 지금은 고토쿠가 사건의 주모자라는 당국의 주장이 날조된 것이었음이 밝혀졌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 학계에서 금기시되는 이름이다. 일본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인 ‘천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인민의 자유와 평등,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한치도 물러섬 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가난한 집안의 신동, 민권 사상의 스승을 만나다
고토쿠 슈스이는 작은 체구에다 평생 병마에 시달린 병약한 천재였다. 그런 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를 지닌 혁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언급했듯이 궁핍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독서 덕분이었다. 본명이 덴지로(傳次郞)인 고토쿠 슈스이는 1871년 9월 도사 번 고치 현에서 약재상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토쿠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고 고토쿠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토쿠는 같은 도사 번 출신인 자유민권운동가 하야시 유조나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을 직접 만나면서 민권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70년대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은 메이지 전제 정권에 맞서 국회 개설과 자유 민권 등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권 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중학교 중퇴 후 좌절에 빠진 고토쿠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을 만나 사제 관계를 맺고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것이다. 고토쿠는 1888년부터 5년 반 동안 나카에 조민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한학과 영어 공부에 매진했고, 나중에 기자가 되어 스승의 집을 떠난 뒤에도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1893년 고토쿠 슈스이는 나카에 조민의 추천으로 당시 자유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자유신문》에 입사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기자로서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사회의 부정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이 익힌 자유민권사상의 정신, 즉 자유, 정의, 평등, 박애의 정신을 추구하려 했으며, 이런 성향 때문에 1898년 진보적인 《만조보》에 들어가기까지 여러 신문사를 전전한다. 《장자》의 편명으로 유명한 ‘슈스이(秋水)’라는 호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이치를 따지는 비타협적인 제자에게 스승 나카에 조민이 젊은 시절 자신의 호를 물려준 것이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고토쿠는 《만조보》에 입사할 무렵 사회주의 사상으로 눈을 돌린다. 청일전쟁 이후 급속히 불거진 심각한 빈부 격차와 노동 문제에 주목하면서 “소수의 욕망 때문에 다수의 복리를 빼앗는” 자본주의 제도를 사회주의 제도로 바꾸지 않는 한 이상 사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마침내 1901년 4월 9일 《만조보》에 기고한 <나는 사회주의자다>라는 글을 통해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01년 5월에는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 창립인으로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은 치안경찰법으로 곧바로 활동을 금지당하고 만다.
노동 문제 해결에 힘쓰는 인사는 심사가 매우 진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열성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법은 진정으로 도의에 맞고 학술에 맞고 문명 진보의 큰 법에 맞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수천 번의 논설도 억만 번의 운동도 완전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진지하고 열성적인 심사는 오로지 공고하고 일정한 이념과 이상, 신앙을 견지하고 변하지 않는 사람일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도의에 맞고 학술에 맞고 문명 진보의 큰 법에 맞는 방법은 오로지 근대 사회주의라야 비로소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자 한다,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노동 문제의 최후의 해결은 성공할 수 없다고. ……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단언한다. 천하의 공중을 향해 공공연하고 당당하게 ‘나는 사회주의자다, 사회당이다’라고 선언하는 진지함과 열성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직 노동 문제의 앞날을 맡기기에는 부족하다. ― <나는 사회주의자다>․468~469쪽에서
이때부터 고토쿠 슈스이는 반제국주의, 반애국주의, 반군사주의, 의회사회주의를 이념의 토대로 삼아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등 여러 권의 책을 연달아 발간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03년 가을 《만조보》가 러일전쟁 개전론으로 신문의 논조를 바꾸자 동료인 사카이 도시히코와 함께 반전론을 주장하며 퇴사해 ‘평민사’를 결성하고 《평민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평민사는 사회주의와 평화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을 펼쳤다.
의회사회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그러던 중 반전 운동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1905년 1월 《평민신문》이 폐간되고 고토쿠 슈스이도 필화 사건으로 1905년 2월부터 5개월간 감옥에 수감된다. 고토쿠는 정부의 탄압을 경험하면서 일본과 같은 비민주적 국가에서는 의회 제도에 입각한 합법적 사회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방법으로 노동자의 총동맹 파업 등을 통한 직접행동론을 택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출옥 후 미국의 아나키스트 앨버트 존슨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1906년 6월에 귀국하기까지 러시아 혁명가들과 미국의 아나키스트들과 폭넓게 교류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훗날 고토쿠는 자신이 아나키즘적 직접행동론을 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솔직히 고백한다. 사회주의 운동의 수단 방침에 관한 나의 의견은 재작년 투옥 당시부터 약간 변했고, 더욱이 작년 여행에서 크게 변하여 지금 몇 년 전을 돌아보면 나 자신도 완전히 딴사람이 된 느낌이 든다. ……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적당한 기관이 없었던 것과 병으로 집필이 어려웠기 때문에 모든 동지 여러분을 향해 대체적인 취지를 분명히 밝힐 수 없었다. 이제 기회가 왔다. 오래 침묵하는 것은 이념을 위하여 결코 충실한 것이 아니다. 그런 탓에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보통선거나 의회 정책으로는 도저히 진정한 사회적 혁명을 성취할 수 없다. 사회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결된 노동자가 직접행동(direct action)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 나의 현재 사상은 이와 같다. ― <내 사상의 변화>․400~401쪽에서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고토쿠는 재미 일본인 혁명가들과 함께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혁명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와 계급 철폐, 세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국제 연대를 통한 사회적 대혁명을 실행할 것을 강령으로 채택한다.
한 사람이 무위도식하기 위하여 백만의 민중이 항상 빈곤과 기아로 울부짖을 때 노동은 과연 무엇이 신성한가. 한 사람이 사사로운 욕심과 복을 마음껏 누리기 위하여 백만의 민중이 완전히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할 때 인생은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한 사람이 야심과 허영심을 채우기 위하여 백만의 민중이 항상 전쟁 침략의 희생이 될 때 국가는 과연 무엇이 존엄한가. 그렇다. 이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닌가. 비참한 인생이 아닌가. 참혹한 국가가 아닌가. 그리고 참으로 의롭지 못하고 부정한 사회가 아닌가. …… 현재의 불공평하고 부정한 사회를 개혁하여 선미한 자유, 행복, 평화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우리들의 조상과 동포와 자손에 대한 책임이자 의무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권리다. 우리들이 사회혁명당을 조직하는 것은 오로지 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이 권리를 행하기 위함일 뿐이다. 동지들이여, 주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오라. ― <사회혁명당 선언>․391쪽에서
“조선 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를 보장하라”
1906~1907년부터 좀 더 급진적인 아나키즘 운동으로 선회한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과 중국 등의 혁명가들에게 아나키즘을 강의하고 여러 글을 통해서 자신의 아나키즘 신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또 이 무렵부터 고토쿠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조선 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를 보장하라”는 내용을 담은 선언서를 《오사카 평민신문》에 공개적으로 발표하기까지 한다(1907년 7월 21일자). 1907년은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내정 간섭을 본격화하는 등 강제 병합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였다. 누구도 한반도 문제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토쿠의 글은 거의 유일한 반대 목소리였다.
정치가는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예전에 청일전쟁을 감행했고, 또 러일전쟁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정치상으로 조선 구제를 실행한다고 거만하게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구제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이유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청일전쟁으로 중국 정부의 권력을 조선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 정부의 권력을 재차 조선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의 정치가는 이를 가리켜 정의의 전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태도가 과연 그들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정의인지 아닌지 이것은 제삼자의 비판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한번 조선 국민의 입장에서 관찰해보라. 이것은 우선 일본, 중국, 러시아 각국의 권력적 야심이 조선 반도라는 공허를 찌른 경쟁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 조선인의 눈으로 보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은 침략자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 <경애하는 조선>․447~448쪽에서
한편, 고토쿠는 190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를 만들고 그의 의거를 기리는 한시를 지어 직접 엽서에 써넣었다. 처음에는 일본 국내에서 만들었으나 일본 정부가 발매를 금지하자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작해 일본으로 들여왔다.
현재 전하는 안중근 초상 엽서는 고토쿠 슈스이가 대역 사건으로 체포될 당시 그의 품에서 발견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사건의 증거와 재판 과정 등 대역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면서 이 엽서 역시 은폐했다. 그 뒤로 오래도록 실물이 발견되지 않다가 1960년대 말에 메이지학원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본문 465쪽)
‘사회주의자 소탕’을 위해 조작된 ‘대역 사건’
1910년 6월 고토쿠 슈스이는 대역 사건의 주모자라는 혐의로 검거된다. 대역 사건이란, 1910년 5월 고토쿠 슈스이의 연인 간노 스가를 비롯한 몇 명의 사회주의자들이 폭탄을 이용한 천황 암살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건이었다. 실행되지도 않았던 이 계획은 사회주의 탄압의 빌미가 되어 부풀려졌고 곧바로 고토쿠를 비롯해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가 검거되었다. 1910년 연말부터 불과 40일간 심리가 진행되었는데 재판부는 24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가 그중 12명은 종신형으로 감형하고 고토쿠 슈스이와 간노 스가 등 12명은 판결 일 주일 만에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고토쿠가 유죄라는 증거는 없었다.
고토쿠 슈스이는 사형 직전까지 감옥 안에서 의연하고 담담한 태도로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진술서>와 <사생>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사형당하기 위해 지금 도쿄 감옥의 일실(一室)에 구금되어 있다. 아아, 사형! 세상 사람들에게 이만큼 꺼림칙하고 두려운 말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신문에서 보고 책으로 읽었어도 설마 자기가 이런 꺼림칙한 말과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릴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정말로 사형에 처해지려 하고 있다. 평소에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들, 나를 아껴주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위를 의심하며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리고 진실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한심하고 딱하고 슬프고 부끄러워했을까. 그중에서도 늙은 어머니는 얼마나 절망의 칼에 가슴을 찔렸을까.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게 사형은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중죄를 저질렀는가. 공판조차 방청이 금지된 오늘날에는 본래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자유는 없다. 백 년 후에 누군가 어쩌면 나 대신 말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사형 그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다. …… 지금의 나에게 수치스럽고 꺼려지고 두려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악인이자 죄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 스스로 논할 문제는 아니고, 또한 논할 자유도 없다. 다만 사형 자체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사생(死生)>․532, 548쪽에서
오늘날 ‘대역 사건’은 당시 일본 정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일제가 조선 병합에 마지막으로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6월에 고토쿠가 체포되고 8월에 조선 병합이 공식 선언된다.) 당시 고토쿠 슈스이와 가타야마 센 등 사회주의자들이 조선 병탄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서는 ‘대역 사건’이라는 강경 사회주의자 소탕 작전을 벌여 골치 아픈 정적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일본 정부의 노림수는 적중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에게 사회주의, 아나키즘은 극악하고 위험한 사상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일시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천황(제)에 대한 언급 자체를 극도로 자제하게 만드는 자기 검열의 족쇄가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준 충격의 본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역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민족과 국경을 뛰어넘는 민중의 연대를 꿈꾸다
왜 지금 우리가 고토쿠 슈스이를 알아야 할까? 고토쿠의 《장광설》을 읽고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진 신채호 등에게 끼친 영향이라든가, 그 당시 일본에서 보기 드물었던 고토쿠의 안중근에 대한 긍정적 태도 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투쟁에 대한 의미 부여보다, ‘지금 여기’에서 고토쿠 슈스이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토쿠 슈스이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인종과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민중 연대의 길을 제시한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고토쿠 슈스이는 무산계급이야말로 국경과 민족과 인종을 넘는 연대를 통한 세계 평화 실현의 주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평화의 비전이 담긴 고토쿠의 사회주의 이론은 애국심과 우승열패를 강조하며 영토 확장을 꿈꾸던 제국주의에 맞서는 일본 사회의 거의 유일한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다. 실제로 러일전쟁 당시 고토쿠는 반전 운동을 벌이면서 적국인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는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냈다.
고토쿠 슈스이는 《평민신문》을 통해 개전 초기인 1904년 3월 13일에 러시아사회민주당에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민중이 연대하여 전쟁에 반대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목소리는 독백이 아닌 대화의 시작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외국 사회주의 언론에 공개한 답변을 《평민신문》이 1904년 7월 24일자에 다시 실은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공동의 계급적인 반전 전선을 구축한 이 일은 일본이나 러시아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동지들이여! 지금 러일 양국 정부는 각자 제국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함부로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인종의 구별도 없고, 지역의 구별도 없고, 국적의 구별도 없다. 그대들과 우리는 동지다. 형제다. 자매다. 결코 싸울 만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적은 일본인이 아니다. 지금의 이른바 애국주의다. 군국주의다. 우리들의 적은 러시아인이 아니다. 지금의 이른바 애국주의다. 군국주의다. 그렇다.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그대들과 우리들의 공통의 적이다. 세계 만국 사회주의자의 공통의 적이다. …… 우리들은 양국 정부의 승패 여부를 예지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귀결되든, 전쟁 결과는 반드시 인민의 곤궁이다. 과중한 세금 부담이다. 도덕의 퇴폐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애국주의의 발호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우리들은 결코 어느 쪽이 이기든 지든 상관이 없다. 요점은 전쟁의 신속한 정지에 있다. 평화의 빠른 회복에 있다. 그대들과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전쟁에 항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러시아사회당에 보내는 글>․337~339쪽에서
또한 1907년에 고토쿠 슈스이가 여러 동지와 함께 참여한 ‘아주화친회’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반제국주의, 반침략 운동의 연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고토쿠와 재일 중국 혁명가들의 직접적 교류가 시작된 것은, 그가 사상적으로 무정부주의로 전향하고 미국에서 귀국한 후부터였다. 귀국 후 고토쿠는 일본 정부의 중국, 조선 침략을 비판하면서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중국 혁명가들 중에서도 중국동맹회 출신의 장지, 류스페이, 허쩐 등은 고토쿠와 교류하면서 그의 아나키즘 사상을 받아들였다. 고토쿠도 그들이 1907년 여름에 조직한 ‘사회주의강습회’ 제1차 모임에 참석하여 무정부주의에 대해 연설하는 등 교류를 하며 국가, 정부, 자본가 등의 권력 계급에 맞선 아시아 민중의 계급적 연대라는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그의 바람대로 비슷한 시기에 중국동맹회의 장타이옌을 중심으로 인도, 필리핀, 일본 등 아시아 혁명가들이 결집하여 ‘아주화친회’를 결성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고토쿠 슈스이가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 연대를 꿈꾸고 그 꿈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했던 일은 21세기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어느 나라에나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