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폭력 문제를 연구해 온 정신의학자가 어느 날 통계를 분석하다 기묘한 수수께끼에 부딪혔다. 그가 분석한 자료는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 통계였다. 한 세기 동안 일관되게 자살률과 살인율이 동시에 높이 솟구쳤다가 동시에 급격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대체 왜 자살률과 살인율이 같이 움직이는 걸까? 슬프거나 ‘미쳐서’ 자살하는 사람과 범죄적 동기로 남을 해치는 살인자가 어째서 동시에 확 늘었다가 확 줄어드는 걸까?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몇 년 동안 끙끙 앓기만 하던 어느 날, 그는 자살률과 살인율의 변화 주기가 대통령 권력 교체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은 더 골치 아픈 의문의 시작이었다. 자살률과 살인율이 대통령에 달렸다고? 대체 왜,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 수수께끼에 도전한 사람은 바로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다. 그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눈에 뻔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보수 정당, 즉 공화당 출신이 대통령이 될 때마다 온 나라가 자살과 살인이라는 ‘치명적 전염성 폭력’으로 고통 받는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인구로 계산하면,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할 때보다 공화당 대통령이 집권할 때 자살자와 타살자가 11만 4,600명이 더 많았다.
자신의 발견에 놀란 저자는 이 결과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지 다각도로 검증했다. 지난 100년간 미국의 인구 변화와 실업, 불황, 불평등 같은 경제적․사회적 변수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각종 통계와 기존 연구 성과를 분석했다. 그 결과 집권 정당과 자살률․살인율 사이에 명백한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가 어느 쪽에 투표하는지에 삶과 죽음이 달렸다.”
빈곤, 불평등, 실업이 증가하면 자살과 살인이 증가한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무력감과 수치심이 폭력을 부추기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보수 정당이 추구하는 사회, 경제 정책은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킨다. 보수 정당은 사회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기고 불평등을 자연의 법칙으로 찬미한다. 이런 정당이 집권할 때 사회에는 수치심, 모욕감, 분노가 팽배하고 자살과 타살이라는 극단적 폭력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불평등과 폭력이 늘어나는 세상으로 몰아가는 보수 정당에 왜 자꾸만 표를 던지는 것일까? 어째서 그 정당과 그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은 불평등과 폭력을 키우는 정책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일까? 무엇이 유권자의 99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게 나라 전체 재산의 40퍼센트 이상을 몰아주게 만드는가? 이 책은 이런 의문에 하나씩 차근차근 답한다.
저자는 시종일관 치밀하고 냉정한 논리로 정치와 죽음의 상관 관계를 밝히고, 자살과 살인이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책임져야 할 문제임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날카롭고 신랄하며 때로 위트 넘치는 문장은 책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준다. 이 책은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국가를 바라는 모든 시민, 유권자, 그리고 정치가들을 위한 중요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폭력의 원인을 연구하던 정신의학자, 충격적 진실을 발견하다
보수 정당인 공화당이 집권할 때는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이 증가하고, 진보 정당인 민주당이 집권할 때는 감소한다. 1900년부터 2007년까지 107년 동안 미국 정부가 발표한 통계 자료를 토대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연의 탓이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전쟁과 공황 같은 역사적 격변이나 대통령 개인의 성향 차이를 비롯한 다른 변수를 뛰어넘을 만큼 강력한 일관성을 보였다.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의 정책에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폭력 치사(살인과 자살의 합계) 발생률.
왼쪽 축은 10만 명당 연간 사망자 수를 나타낸다. 그래프에서 1명이 더 죽었을 경우, 현재 미국 인구 3억 명 중 3천 명이 더 죽는 것을 가리킨다.
공화당 집권기에는 올라가고, 민주당 집권기에는 떨어지는 경향이 뚜렷하다. 공화당 집권기에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봉우리가, 민주당 집권기에는 급격하게 하락하는 골짜기가 3번 나타난다.
이 충격적인 발견을 내놓은 사람은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다. 40년 이상 폭력의 원인과 예방을 연구해 온 폭력 문제 전문가인 그는 통계 자료를 분석하다가 우연히 이 사실을 발견하고 두 눈을 의심했다. 혹시 자신의 발견이 왜곡된 것은 아닌지 검증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발표한 공식 통계를 비롯해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검토하고, 조사 대상 시기를 세밀하게 쪼개보거나 여러 가지 계산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1900년에 10만 명당 15.6명이었던 폭력 치사(살인과 자살의 합계) 발생률은 1912년까지 공화당이 쭉 집권하면서 21.9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13년에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이 되고 1914년부터 1920년까지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꾸준히 감소하여 17.4명까지 떨어졌다. 윌슨 정권이 끝나고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2년 동안에는 다시 공화당이 쭉 집권했다. 공화당 집권기에 폭력 치사 발생률은 다시 올라가서 1932년에는 26.5명으로 급등했다. 오늘날의 미국 인구 3억 명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 해에 79,500명이 살인과 자살로 죽은 셈이다.
1933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집권하면서 20년간의 민주당 집권기가 시작되었고, 폭력 치사 발생률은 다시 급속하게 내려갔다. 1944년에는 15명으로 공화당 집권기 마지막 해의 26.5명보다 약 43퍼센트 떨어졌고, 오늘날 인구로 계산하면 한 해에 34,500명이 적게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약간 상승한 것을 제외하면 1969년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폭력 치사 발생률은 20명 아래를 유지했다.
닉슨에 이어 공화당의 포드가 집권하면서 폭력 치사 발생률은 1975년에 23.2명까지 치솟았다. 1969년부터 1992년까지 24년 동안 공화당은 20년을 집권했고, 이 시기에 폭력 치사율은 대체로 20명을 넘는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1993년 공화당 출신 아버지 부시의 뒤를 이어 민주당의 클린턴이 취임하면서 폭력 치사 발생률은 다시 가파른 하락세를 보여서, 클린턴의 재선 임기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16명까지 떨어졌다.
2001년 공화당의 아들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폭력 치사 발생률은 요동치며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2007년 이후의 확실한 통계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2007년 한 해에 10만 명당 폭력 치사 발생률이 17.2명으로 늘어났고 클린턴의 재선 임기 마지막 해에 비해 살인과 자살로 죽는 사람이 연간 3,600명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범인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다
또 하나 놀라운 발견은 자살률과 살인율이 동시에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쪽을 끌어올리는 어떤 원인이 다른 쪽도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일반적 통념으로 보면 살인과 자살은 서로 상관없는 사건이다. 살인은 나쁜 범죄자가 저지르는 일이고, 자살은 슬프거나 ‘미친’ 사람이 저지르는 일이니 함께 오르내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통계 수치는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살인과 자살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요인의 영향을 받아 동시에 움직이는 사회 현상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저지르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살인과 자살을 근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폭력으로 보고, 저자는 살인과 자살을 하나로 묶어 ‘폭력 치사’라고 부른다.
자살을 개개인의 정신 질환으로 보고 살인을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윤리적 결함으로 보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부분적으로는 사회・경제・정치적 압력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정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도외시하는 태도다. 유전이라든지 인생 경험이라든지 개인의 성격 구조 같은 허다한 개인적 변수가 개인이 자살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경향을 높이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폭력 치사가 전염병 수준으로 일어나는 것은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 환경에서 생겨난 변화 탓이다. ― 3장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120쪽)에서
통계 수치가 보여주는 상관 관계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파헤치고자 저자는 정치․경제․사회적 분석에 뛰어든다.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개인적 삶에서 정신적 고통이나 장애의 원인을 찾아내는 의사로 살아온 자신이 이런 분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나는 의사지 경제학자나 정치학자가 아니다. 나의 관심사와 내가 훈련받고 경험한 분야는 삶과 죽음의 문제였지 불황과 선거 문제가 아니었다. …… 폭력으로 인한 죽음의 원인과 예방을 연구하다가 뜻밖에 특정한 정치・경제 현상이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거나 그런 행동을 예방하거나 치유하는 ‘보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누구나 그랬을 테지만 깜짝 놀랐다.― 7장 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219쪽)에서
의학은 원래 가치 판단을 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의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인간 생명이라는 가치, 혹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할 때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울까》는 정치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생명을 말하는 책이고, 죽음을 부르는 정치에 대한 예리한 고발이자 생명을 구하는 정치를 찾아 나서는 절실한 호소문이다.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
자살률과 살인율의 증감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실업이다. 실업률이 높아질수록 살인율과 자살률이 높아지며, 실업과 연관된 경제 변수인 빈곤, 불평등, 불황 또한 폭력 치사 발생률과 정비례한다.
문제는 공화당 집권기에 민주당 집권기보다 실업, 빈곤, 불평등, 불황이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반면, 민주당은 과도한 규제와 복지 정책 탓에 경제를 성장시키는 데는 소질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료를 분석한 결과는 이러한 통념과는 정반대다. 공화당 집권기에는 민주당 집권기보다 실업률이 더 높았고, 불황이 더 자주, 심하게, 오래 지속됐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 역시 덜 성장했다.
1900년부터 2008년까지 모든 공화당 정부 집권기에 실업률이 증가하거나 감소한 정도를 전부 더하면 총 27.3퍼센트가 늘어났다. 반면 민주당 정부 집권기에는 총 26.5퍼센트가 줄어들었다.
불황은 공화당 정부 때 민주당 정부 때보다 3배 더 자주 시작되었다. 공화당의 불황은 45퍼센트 더 오래 갔고, 민주당 때 시작된 불황보다 공화당 때 시작된 불황이 4배 더 오래 갔다.
1948년과 2005년 사이에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1인당 실질 국민총생산은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동안 1.64퍼센트 늘었고,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는 2.78퍼센트 늘었다. 공화당 집권기보다 민주당 집권기에 70퍼센트 더 많이 성장한 것이다.
불평등을 줄이려는 정책이 경제를 번영시킨다
두 정당의 경제 성적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정당의 경제 정책이 저마다 다르다는 데서 비롯한다. 공화당은 최상류층에게 부를 몰아주는 정책을 펼치고,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저소득층과 중간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펼친다. 상위 1퍼센트에게 부를 몰아준다면 나머지 99퍼센트는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공화당 정부 때는 저소득층과 중간소득층의 소득 증가율이 부유층의 소득 증가율을 크게 밑돌았고, 민주당 정부 때 나타난 저소득층과 중간소득층의 소득 증가율과 비교해도 크게 낮았다.
‘광란의 20년대’에 공화당이 이루어놓은 부의 양극화를 뒤집은 것은 1933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뉴딜 합의였다. 이것은 어려운 사람에게 처음으로 지급된 소득 보조금(사회 보장비, 실업 수당 등), 실업 감소, ‘최저 임금’과 병행하여 최고 소득세를 90퍼센트까지 끌어올려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은 사실상의 ‘최고 임금’ 제도 도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제도들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은 일부 경제사학자들이 소득과 재산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데서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라고 부르는 결과를 낳았다. 대략 1940년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가장 번영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장 평등하고 가장 비폭력적인 …… 시대를 누렸다. ― 3장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96~97쪽)에서
하지만 1969년에 공화당이 정권을 되찾으면서 평등의 시대가 끝나고, 1980년대의 레이건 시대에 와서는 불평등이 1920년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1990년대에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불평등이 심화하는 속도는 전임 공화당 대통령들 때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클린턴이 실업을 줄이고 최고 소득세, 근로 장려세(직업이 있지만 소득이 낮은 사람에게 돈을 주는 마이너스 소득세), 평균 임금, 최저 임금을 끌어올림으로써 국민 전체의 재산과 소득 중 일부를 부유한 자에게서 가난한 자에게로 재분배하는 효과를 낳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덕분이었다.
왜 99퍼센트의 못 가진 사람들이 1퍼센트를 위한 정당에 표를 줄까?
이처럼 살인과 자살을 늘릴 뿐 아니라 경제 성적표도 신통찮은 정당이 공화당이다. 그런데도 미국 국민은 도대체 왜 공화당에 표를 던지는 것일까? 저자는 불평등과 폭력을 키우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공화당이 이기는 데 도움을 준다는 모순된 구조를 밝혀낸다. 불평등은 폭력 범죄를 늘리고, 범죄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면 미국인은 인권과 복지를 중시하는 진보적 정책을 비난하고 보수 성향의 후보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 범죄자를 단호하게 응징하는 정책에 동의하고, 범죄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저소득층에게 복지 혜택을 ‘거저 주는’ 데 거부감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이 최하류층을 미워하게 만드는 ‘분할 정복’ 전략을 발판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폭력 범죄의 주된 희생자는 못사는 사람이므로, 폭력 범죄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잘사는 사람은 어차피 경비원이 지키는 공동 거주 구역 안에서 살거나 비싼 돈을 주고 사설 경비업체를 고용하므로 별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 범죄율과 폭력 발생률이 높아질수록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서로를 증오하도록 농락당하며 자기 주머니를 진짜 털어 가는 사람은 자신들 가운데 있는 비교적 소수인 무장 강도가 아니라 더 소수인 아주 잘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하면서 돈을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손에서 최상류층의 손으로 옮기는 공화당 정치인임을 깨닫기 어려워진다. ― 3장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103~104쪽)에서
찰스 슈머 상원의원은 공화당의 전략을 이렇게 규정한다. “공화당은 범죄자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공화당은 인종 문제로 분열될 때만 이긴다. …… 낙태나 동성애 같은 인종 아닌 문제로 이기려 들면 번번이 진다. 공화당이 범죄를 물고 늘어지는 건 그래서다. …… 그러면 이긴다. 공화당은 그걸 안다.” ― 3장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105~106쪽)에서
분할 정복의 열쇠는 높은 범죄율
분할 정복에는 높은 범죄율이 도움을 준다. 공화당은 범죄자를 단호하게 다스리는 정책을 내세우지만, 그런 정책은 실제로 오히려 범죄를 부추긴다. 공화당 출신의 닉슨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수감률은 무려 7배나 늘어났다. 엄격한 마약 단속, 청소년을 성인 교도소로 이송하는 정책, 아동 체벌 합법화, 개인의 총기 소유 합법화를 비롯한 공화당의 정책이 폭력을 부채질한다는 연구 결과를 저자는 하나하나 짚어준다.
예를 들어 아동을 심하게 처벌하면 아동의 폭력 성향이 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숱하게 나와 있지만, 공화당 정권은 아동 체벌 합법화를 계속 추진하며 공화당 의원과 지지자들은 이런 정책을 강력히 지지한다. 1984년부터 1994년 사이에 14~17세 미국 청소년의 살인율과 살인 희생률이 3배로 뛰었는데, 대부분 권총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개인의 총기 소유가 법으로 금지되는 것은 요원하다. 공화당은 권총 규제에 반대하는 핵심 로비 집단인 미국총기협회를 지지하고 미국총기협회는 공화당을 후원한다.
그래서 공화당은 실제로는 범죄율을 증가시키면서도 겉으로는 범죄를 엄격하게 처단해서 범죄율을 끌어내리고 싶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범죄 대처에 미온적이라고 민주당을 비난해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만약 범죄율이 높지 않다면 공화당은 범죄를 강력히 응징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표를 휩쓰는 전략을 잃어버릴 것이다.
수치심이 사람을 죽인다
폭력을 이해하려면 사회적 원인과 더불어 폭력을 저지르는 개인의 심리를 파악해야 한다. 희생자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결국 폭력을 휘두르는 주역은 개인이므로, 무엇이 개인을 폭력으로 이끄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폭력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한다.
저자는 폭력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으로 수치심을 지목한다.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괴로울 때 자기 안에 있는 수치심을 남한테 떠넘겨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혹은 수치심을 느끼는 고통을 처음부터 피하려고 남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사람들이 남을 해치는 것은 더 약한 사람, 그래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남임을 증명하려는 심리 때문이다.
한편 수치심은 살인뿐 아니라 자살도 유발한다. 남을 해침으로써 수치심을 해소하려는 충동에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공격성의 화살을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겨누기도 한다. 수치심이 자극하는 타인에 대한 폭력적 충동은 때로 자기 자신에게라도 터뜨려야 겨우 남에게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살인과 자살은 둘 다 수치심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치심을 많이 느끼는 사회에서는 살인율과 자살률이 동시에 올라간다.
사람들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 자살의 전모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죄의식이라는 또 다른 감정도 고려해야 한다. 죄의식은 자신을 꾸짖는 감정이다. ……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유발하며 이런 행동은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살인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죄의식의 심리적 기능은 수치심이 자극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저지하는 것(곧 막는 것)이다. 그런데 수치심이 자극하는 타인에 대한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은 때로 자기 자신에게라도 터뜨려야 겨우 타인에게 화살이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 4장 수치심이 사람을 죽인다(127~128쪽)에서
수치심은 우파 정치의 핵심 정서다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은 명예를 만끽하고 열등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는 위계화한 사회 체제를, 죄의식의 윤리는 아무도 남들에게 우월감을 못 느끼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는 굴욕을 맛보지 않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기독교 사상, 심리학과 인류학에서 두 갈래의 가치 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정치에서 수치심은 우파 정치의 핵심 정서이고 죄의식은 좌파 정치의 핵심 정서다. 현대 미국의 우파 정당 공화당과 좌파 정당 민주당에서도 두 가지 윤리의 차이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판이한 태도의 정치적 실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내세운 대조적 기치에서 볼 수 있다. 루스벨트는 말했다. “진보의 성패는 많이 가진 사람의 풍요에 우리가 더 얹어주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너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충분히 베풀어주는가 여부에 달렸다.” 반면에 레이건은 (공화당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미국을 보고 싶어 하는 당이다.” 루스벨트는 …… 실제로 경제 정책과 정치 활동을 통해 그런 목표를 이루었다. 레이건은 아직도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강자(상대적으로 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비교 대상이 없으면 무의미한 개념)를 챙겼고 불평등을 늘리는 쪽을 옹호했다고 볼 수 있다.(부자 감세, 빈민에 대한 복지 혜택 축소, 기업 규제 축소, 노조 억제 같은 경제 정책과 정치 활동을 통해서 바로 그런 목표를 이루었다.) ― 4장 수치심이 사람을 죽인다(133~134쪽)에서
보수 정당 지지자 대 진보 정당 지지자
2000년 11월 7일,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앨 고어는 미국의 43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격전을 벌였다. 다음 날 아침, 미국인은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놀라운 지도를 보았다. 나라가 정치적으로 ‘적색 주’와 ‘청색 주’로 갈린 것이다. 적색 주들은 부시를 찍었고 청색 주들은 고어를 찍었다.
◀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공화당의 부시가 승리한 지역, 푸른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민주당의 고어가 승리한 지역이다. 숫자는 각 주별로 배정된 선거인단 수를 나타낸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대립이 아니라 더 폭력적인 문화와 덜 폭력적인 문화의 대립이기도 했다. 공화당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공화당이 지배하는 시대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늘어나고, 민주당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민주당이 지배하는 시대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줄어든다. 2004년에 적색 주의 폭력 치사 발생률은 10만 명당 19.6명으로 나타났고 청색 주에서는 14.2명으로 나타났다. 적색 주에서는 청색 주에 비해 사형과 수감 비율도 월등히 높다. 1976년에서 2009년 사이에 적색 주에서는 1,177명이 사형당한 반면 청색 주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54명이었다.
적색 주의 대부분은 미국 남부와 서부 지역이다. 남부와 서부에는 인종 차별,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와 린치 같은 관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러한 폭력적 문화의 바탕에 바로 수치심의 윤리가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 남부 같은 사회는 좀 더 ‘극단적인’ 수치 문화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 예나 지금이나 수치심과 폭력 행동을 낳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관행들을 지켜 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 사회 계층의 강화다. 노예제는 이런 사회 계층화의 극단적 모습이었으며 인종 계층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높은 수감률과 선거권 박탈 같은 수단을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같은 국민 안의 일부 집단을 신분 위계 안에서 더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은 그들에게 수치심과 굴욕감을 안기는 일이다. …… 그렇게 하면 남부에서 볼 수 있듯 폭력의 정도가 더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난다. ― 6장 보수 정당 지지자와 진보 정당 지지자(168쪽)에서
적색 주와 청색 주의 차이는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의 차이와 비슷하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차이와도 비슷하다. 적색 주처럼 수치심의 윤리가 지배하는 문화에서는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이 자라나고,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열등함의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정책을 내놓는 공화당 행정부를 재생산한다. 적색 주와 청색 주의 사례는 지지 정당, 문화, 인격이라는 세 가지 변수의 밀접한 연관성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내 가족의 생명이 나의 한 표에 달렸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울까》는 다른 정치인들보다 더 해로운 정치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즉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대통령 개인의 인격보다 사회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때 유권자들의 투표 기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개인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속한 정당을 찍는 것임을, 좋든 싫든 그 정당과 결부된 모든 이념을 보고 투표를 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사실 선거 운동의 틀을 두 후보의 순전히 개인적인 대결로 몰아가려는 목적 중 하나는 두 당의 실제 정책 차이가 무엇인지에 유권자가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데 있다. 그래야 개인적으로 어떤 일을 성취했고 어떤 추문과 결부되었는지를 놓고 개인들에게 논쟁이 집중되고, 두 정당의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고 두 정당이 정치와 경제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었는지에는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 7장 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217쪽)에서
한편 폭력 행동이 일어난 다음에 치료 또는 징역과 같은 사후 처방전을 제공하는 것보다, 폭력을 유발하는 사회·경제적 위험 요인과 폭력을 예방하는 보호 요인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중요하다는 것 또한 이 책이 전해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19세기에 우리는 청결한 식수 공급과 하수 체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의사, 약, 병원보다 죽음을 예방하는 데 훨씬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20세기에 우리는 식중독에 걸리고 나서 치료하는 것보다 식품이 오염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 훨씬 싸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에 우리는 자살, 살인이라는 전염병을 막고 다스리려면 그런 전염병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불평등, 치욕, 절망이라는 병인을 줄여서 청결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런 위험 요인에 이미 노출된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처벌하는 데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 7장 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222~223쪽)에서
지은이 소개
제임스 길리건 James Gilligan
1966년부터 2000년까지 34년간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뉴욕대 정신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십 년간 폭력 행동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폭력 예방책을 연구해 온 폭력 문제의 권위자이다.
하버드대 법정신의학 연구소 책임자로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매사추세츠 주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심리학적 프로젝트를 실시해 교도소 안의 살인율과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1년 하버드 대학에서 ‘폭력의 뿌리’라는 주제로 강의한 뒤 그 내용을 정리해 《폭력: 국가 전염병에 관한 성찰》로 펴냈다. 이 책은 폭력의 심리적,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 문제작으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폭력 연구에서 교과서적 저작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2000년에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소년범죄예방위원회를 총괄했으며, 2005년에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발표된 아동 폭력에 관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2011년에 발표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는 길리건 교수가 평생을 바친 폭력 연구의 핵심이 담긴 폭발성 강한 저작이다. 정신분석을 공부한 정신의학자로서 수많은 임상 경험을 쌓은 저자는 자살과 살인이라는 치명적 폭력의 급격한 변화 원인을 추적한 끝에 문제의 중심에 대통령과 정당이 있음을 밝혀낸다.
제임스 길리건과의 일문일답 ― Psychotherapy.net에 게재된 인터뷰 요약 발췌
폭력 범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렸을 적 저희 아버지는 제 형들을 자주 때리셨습니다. 저는 많이 맞고 자라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형들을 언제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벌 떨곤 했지요. 뚜렷하게 의식하지는 않았어도 그때의 기억 때문에 저는 평화를 중시하는 성격이 되었고, 그래서 폭력 예방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사 초년생 때는 범죄자들을 치료할 생각을 전혀 못 했습니다. 범죄자 치료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교도소에서 한 상담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순전히 돈을 벌려고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어요. 하버드 의대 레지던트로 있을 때 저는 이미 세 아이의 아빠였는데, 병원에서 주는 월급은 너무 적었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범죄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성찰하려는 의욕은 없고 치료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거짓말이나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교도소에 들어선 순간, 제가 알던 거의 모든 것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범죄자들을 환자로 만나는 것이 무섭지는 않으신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오해입니다. 교도소에서 일하는 것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방식만 제대로 안다면 말이지요.
범죄자는 치료할 수 없다는 오해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폭력 범죄자들을 만나면서 제가 도달한 결론은 치료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환자에게 심각한 폭행을 당한 적이 3번 있습니다. 다행히 코나 턱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다가 보통 오후 4시경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피곤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집에 가고 싶어지는 시간대입니다. 그 시간대에 저는 산만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환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은 제가 그들에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저를 때림으로써 제 관심을 끌려고 한 것이지요. 실제로 많은 폭력이 상대방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에서 발생합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존중받는다고 느낀다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무시당했다고 해서 누구나 다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는데, 그들은 왜 폭력을 저지른 걸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존감을 자기 힘으로 회복할 만한 자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육을 받았고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무시당하고 모욕당해도 견딜 수 있는 겁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자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육을 통해 그런 자원을 키울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와 제 동료들은 보스턴 대학 교수들을 초빙해서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대학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30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보통 범죄자들이 출소한 뒤 또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돌아오는 확률은 65퍼센트입니다. 하지만 30년 동안 대학 학위를 따고 출소한 사람들의 재범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반성하게 된 수감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는 경향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반성하면서도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글을 아는 수감자는 글을 모르는 수감자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범죄자들 중에는 문맹이 많거든요. 법을 아는 수감자는 다른 수감자들이 간단한 법적 서류를 작성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지요. 식당에서 요리를 하는 것도 가능하고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이 쓸모가 있는 장소가 곧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겁니다.
사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내가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지요.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데요. 정신의학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신과 의사가 될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이미 의사로 일하고 있던 친구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면 평생 동안 수백 명의 환자밖에 못 볼 거야. 정신분석학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데 말이지. 지구 인구는 60억 명이나 되는데 정신과 의사들이 치료할 수 있는 환자는 한 줌밖에 안 돼.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효과는 실제로 진료하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네가 환자들에게서 무엇을 배우는지에서 오는 거야. 네가 배운 것은 아이 양육이나 교육, 형사 사법 체계 같은 다른 맥락에서 적용될 수 있어.”
제 아이들이 태어날 때 저는 분만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요즘 남편들은 부모와 자녀, 아빠와 엄마 사이의 유대감을 키워준다는 까닭에서 분만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지요. 정신의학이 우리의 삶에 끼친 수많은 영향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수감자들을 매일 불러다 소파에 앉혀놓고 상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의학에서 배운 것을 정신의학과 다른 맥락에 적용하고 있고, 그러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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